조선 여인들의 수난사 -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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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희생이 필요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녀였다. 공녀를 원한 명나라 황제 중 유명한 사람은 성조 영락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한다....


조선 여인들의 수난사 - 공녀 - 자유게시판 ㆍ로그인|회원가입|마이페이지|대화방|IRC|미니온|LAB|운영자에게|ㆍ접속자 : 133 (회원 73)오늘 9,483 어제 34,300 전체 57,775,570 Home 정보 뉴스&정보 이벤트게시판 라이트노벨 신간 십시일반 블로그등록 도서검색 포럼 일반포럼 시사게시판 설정 네타게시판 네타게시판(타입문) 창작 일반창작1관 일반창작1관 일반창작2관 일반창작3관 자유창작1관 자유창작1관 자유창작2관 창작완결 작품소개 창작잡담 창작그림 팬픽 해외팬픽 해외팬픽 1관 (ㄱ~ㄷ) 해외팬픽 2관 (ㄹ~ㅊ) 해외팬픽 3관 (ㅋ~ㅎ/A~Z) 해외팬픽 AA관 타입문팬픽 타입문팬픽 (구)팬픽게시판 팬픽소개 팬픽요청 완결팬픽 취미 감상게시판 온라인게임 소셜게임 일반게임 웹코믹 지름게시판 커뮤니티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질문게시판 추천게시판 UCC게시판 장터게시판 FAQ 등급조정 징계게시판 방명록 모바일오늘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꼭 하세요. 사랑은 과하게 전해도 독이 되지 않습니다.- 닥터 회색자유게시판 권장사항 : 정치·시사글 금지/매너있는 신사숙녀가 되자/질문은 질문게로 총 게시물 81,777건, 최근 0 건 조선 여인들의 수난사 - 공녀 글쓴이 : 환백 날짜 : 2011-03-07 (월) 16:33 조회 : 3646 글주소 : http://www.typemoon.net/freeboard/546863 http://www.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 (152) 조선 초기 조선의 외교방침은 대명사대였다.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명과 갈등을 빚어 전쟁을 자초하기보다는 사대하고 전쟁을 회피해보자는 그런 국가전략이었다.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방침이었을지는 모르나 고려말기 수많은 전란으로 지친 사람들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강대국과의 사대와 그 외의 국가에게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시에 펼치는 교린으로, 조선은 200년간 ‘그럭저럭’ 평화로울 수 있었다. (Ang?)다만 대명사대에는 몇 가지 희생이 필요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녀였다. 공녀를 원한 명나라 황제 중 유명한 사람은 성조 영락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한다.(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링크1을 참조)조선왕조 실록에서 황엄을 키워드로 찾아보면 기사가 백여개는 나온다.(이 놈의 자식을...)이 과정에서 조선은 순순히 공녀들을 차출하였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0월 11일(을유) 2번째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경복궁에 가서 황엄·전가화(田嘉禾) 등과 더불어 다시 처녀를 선발하였다. 뽑힌 자가 모두 5인인데, 고 전서(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이 첫째이고, 전 전서(典書) 임첨년(任添年)·전 지영주사(知永州事) 이문명(李文命)·사직(司直) 여귀진(呂貴眞)·수원 기관(水原記官) 최득비(崔得霏)의 딸이 다음이었다. 술과 과실을 주고, 각각 중국 체제(體制)의 여복(女服)을 주었는데 모두 채단(綵段)으로 만들었다.임금이 환궁하여 대언(代言)들에게 이르기를,“황엄이 선정(選定)한 고하(高下) 등제(等第)가 틀렸다. 임씨(任氏)는 곧 관음 보살(觀音菩薩)의 상(像) 같아서 애교와 태도가 없고, 여씨(呂氏)는 입술이 넓고 이마는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냐?”하였다.태종 이방원 : 시풋! 얼굴도 볼 줄 모르는 여자만 밝히는 되놈들!!사관들 : (우리 괴롭히는 건 몰라도 이건 동의함다!)태종 이방원 : 권씨는 내 어머니가 될 여자였다.그녀를 감히!!사관들 :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게다가 그건 뭔 말도 안되는 소리요! 그 권씨랑 이 권씨는 다른 사람 아뇨? 이 사람 노망했나?)또한 국가적으로는 공녀를 차출하는데 협력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저항하는 면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8월 28일(계묘) 2번째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지평주사(知平州事) 권문의(權文毅)를 순금사 옥(巡禁司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풍해도 순찰사(豐海道巡察使) 여칭(呂稱)이 돌아와서 황엄(黃儼)에게 이르기를,“문의(文毅)의 딸의 자색(姿色)이 권집중(權執中)의 딸만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황엄이 권씨(權氏)의 절색(絶色)을 구(求)해서 하루 속히 보려고 하는데, 문의가 그 딸이 병이 났다 칭탁하고 시일을 오래 끌며 떠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지인(知印) 양영발(楊榮發)을 보내어 독촉하니, 문의가 마지못해서 치장(治粧)을 하여 길을 떠나는 체하였다. 영발이 말을 달려 돌아오니, 문의는 마침내 딸을 보내지 않았다. 황엄이 노(怒)하여 말하기를,“저와 같은 미관(微官)도 국왕이 제재하지 못하니, 하물며 거가(巨家)·대실(大室)에 미색(美色)이 있다 한들 어찌 내놓으려 하겠는가?”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문의를 가두었다. 황엄 : 님, 애들이 말 참 안 듣네욬크크크크크크크 태종 이방원 : 시풋! 이 색히들이!(아오 쳐 죽일 수도 없고) 저 인간 집어 넣어! 권문의 : 내딸은 지켰다. 훗여담이지만 기존의 7명 중에서 5명을 태종과 황엄이 함께 고르기로 방침을 정한 직후인 10월 6일 태종은 권문의의 석방을 명한다. 태종 이방원 : 님, 수고했음 권문의 : 내 딸은 안 보내도 되지요? 태종 이방원 : 님이 내 장인이 되면... 권문의 : 다시 옥에 들어가게뜸 태종이방원 : 농담이었음. 아하하... 어찌되었건 조선은 공녀를 차출하여 명에 보내었고 영락제가 생존해있는 동안 총 세 번의 공녀 차출이 있었다.(1408년, 1409년~10년, 1417년)그 중, 첫 번째 공녀에 속하여 그 중 첫째라고 하는 권씨는 영락제의 본처인 인효서황후(仁孝徐皇后)가 1407년 죽은 후 명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영락제는 권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총애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명사 후비전》에 기록된 유일한 조선여인이기도 하다. 물론 자국민이 아니라서인지 그녀에 대한 기록은 짧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명에서의 그녀의 삶은 다음과 같다. 1408년 4월~11월 명에 보내질 공녀로 차출, 5명 중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보임.(권집중의 딸 18세, 임첨년의 딸 17세, 이문명의 딸 17세, 여귀진의 딸 16세, 최득비의 딸 14세였다.)로리콘은 범죄입니다.1409년 1월 남경에 도착, 영락제는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였으며 그녀의 특기인 옥피리를 듣고서는 마음에 들어하여 그날 밤으로 일을(-_-;;;) 치름. 즉각 빈賓이 되었고 한 달 후인 1409년 2월에는 현비賢妃가 됨.(그러나 훗날에는 그냥 권비라고 부름) 영락제는 인효서황후가 죽은 후 따로 황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셈. 게다가 전해지기로는 권씨가 사실상 황후나 다름없었다고 함.맨 처음 권씨와 함께 공녀로 끌려간 4명의 궁녀들도 모두 직함을 받았는데, 통훈대부(通訓大夫) 인녕부좌사윤(仁寧府左司尹) 임첨년(任添年)의 딸, 임(任)씨는 순비(順妃)로, 통덕랑(通德郞) 공안부판관(恭安府判官) 이문명(李文命)의 딸, 이(李)씨는 소의(昭儀)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좌시위사중령호군(忠佐侍衛司中領護軍) 여귀진(呂貴眞)의 딸, 여(呂)씨는 첩여(첩여)로, 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최득비(崔得霏)의 딸, 최(崔)씨는 미인(美人)으로 봉해진다. 조선덕후 황제 탄생이요(MK-2는 만력제)1410년 영락제가 달단 원정을 위해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겨가는 것을 수행하였고 이후 남경으로 개선하는 길에 산동의 임성이라는 곳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함. 영락제는 직접 제문까지 지어가며 그녀를 추모하였으며 지금도 산동성 역현(현재는 조장시 역성구 棗庄市 역城區)에는 권비의 무덤이 남아있음. 당대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자에게 사랑받는 삶을 산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애첩의 죽음에 영락제는 그 이유를 찾았고 작은 여呂씨(역사상 장비(庄妃)라고 불렸다)의 고변으로 조선 여인들이 질투에 의해 권비를 독살했다는 정황을 포착하게 된다. 그리고 영락제는 분노하여 장비(庄妃)의 고변에 따라 큰 여呂씨(康妃 : 사직(司直) 여귀진(呂貴眞)의 딸)를 비롯한 330명의 궁녀, 비빈, 환관 등을 처형해 버린다.그 바람에 태종 14년 9월 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원민생이 그 같은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태종은 여씨의 어머니와 친족들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기도 했다. 여씨는 명나라 조정의 한 달여에 걸친 단근질형(烙刑)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독한 놈,죽이려면 곱게 죽일 것이지)그리고 다시 이 일이 불거지게 된 어여의 난 (NTR사건+ 이 과정에서 과거의 삽질이 밝혀짐)때 다수가죽게 된다. 현인비 독살사건의 범인이 조선 출신인 여씨가 아니라 그 사건을 고변했던 중국 상인의 딸이었던 여씨(주동자)였기 때문.이때 조선 출신의 여인 중, 임씨와 정씨는 목을 메어 자살하였고 황씨와 이씨는 처형당하였다. 다행히도 수원 기관(水原記官) 최득비(崔得霏)의 딸인 최씨는 병에 걸려 그자리에 없었던 덕에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조선 여인 중에 한씨가 있었는데 이 여인의 경우 한확의 누이로 훗날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라고 불리게 되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마저도 이 때 목숨이 위태로웠으니, 방에가두어 굶겨죽이려고 하였으나 이를 불쌍하게 생각한 한 환관이 먹을 것을 넣어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세종 26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17일(무오) 2번째기사 사신이 말하기를, “전후로 〈중국에〉 뽑혀 들어간 〈우리 나라 여자〉 한씨(韓氏) 등이 모두 대행 황제(大行皇帝)에게 순사(殉死)하였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인(商人)의 딸 여씨(呂氏)가 황제의 궁중에 들어와 본국의 여씨(呂氏)와 동성이라 하여 좋게 지내려고 하였으나, 여씨가 들어주지 아니하므로, 상인의 딸 여씨가 감정을 품고, 권비(權妃)가 졸(卒)하게 되자, 여씨가 독약을 차에 타서 주었다고 무고하였다. 황제가 성을 내어 여씨와 궁인 환관 수백여 명을 죽였다. 그 뒤 상인의 딸 여씨가 궁인 어씨(魚氏)와 함께 환자(宦者)와 간통하였는데, 황제가 알면서도 두 사람을 총애하는 정리로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목을 매어 죽었다. 황제가 성이 나서 사건이 상인의 딸 여씨에게서 났다 하고, 여씨의 시비(侍婢)를 국문하니, 다 무복(誣服)하여 시역(弑逆)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므로, 그 일에 연좌(連坐)된 자가 2천 8백 인인데, 모두 친히 나서서 죽였다. 어떤 이는 황제의 면전에서 욕하기를, “자기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내시와 간통한 것인데, 누구를 허물하느냐.”고까지 하였다. 뒤에 황제가 화공을 시켜 여씨와 젊은 환관과 서로 포옹하고 있는 형상을 그려서 후세에 보이려고 하였으나, 어씨(魚氏)를 생각하여 그러지 못하고 수릉(壽陵) 곁에 묻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파내어 버렸다. 이 난이 처음 일어날 때, 본국의 임씨(任氏)·정씨(鄭氏)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황씨(黃氏)·이씨(李氏)는 국문을 받아 참형을 당하였다. 황씨는 다른 사람을 많이 끌어 넣었으나, 이씨는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지라,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 넣을까. 나 혼자 죽겠다.”하면서, 끝까지 한 사람도 무고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이에 본국의 여러 여자가 모두 죽었는데, 홀로 최씨(崔氏)는 일찍이 남경에 있었다. 황제가 남경에 있는 궁녀를 부를 때, 최씨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난이 일어나 궁인을 거의 다 죽인 뒤에 올라왔으므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씨(韓氏)는 난이 일어났을 때 빈 방에 가두어 두고 여러 날 동안 음식도 주지 아니하였는데, 문을 지키던 환자가 불쌍히 여겨 때때로 먹을 것을 문안에 넣어 주었으므로 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몸종은 모두 잡혀서 죽고, 유모 김흑(金黑)도 옥에 들어갔는데, 사건이 끝난 뒤 특사되었다. 처음에 황씨가 북경에 가기 전에 형부 김덕장(金德章)이 황씨의 거처하는 방 창문 밖에 앉아 있었다. 황엄(黃儼)이 이것을 보고 크게 성을 내어 꾸짖었다. 북경에 들어갈 때 도중에서 복통이 일어났는데, 의원이 여러가지 약을 써도 아무 효험이 없고, 김치국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엄이 원민생(元閔生)에게 그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민생이 담가 만드는 법을 자세히 말하니, 엄이 얼굴빛을 변하면서 이르기를, “사람의 살을 먹고 싶다고 한다면 내가 다리를 베어서라도 바치겠으나, 이러한 황무지에서 어떻게 그런 물건을 얻을 수 있느냐.”하였다. 황씨의 복통은 낫지 아니하여 밤마다 몸종의 손으로 그 배를 문지르게 하였는데, 어느날 밤에 소변할 때에 음부에서 한 물건이 나왔는데, 크기가 가지만한 가죽으로 싼 살덩이였다. 몸종이 칙간에 버렸으나, 일행의 여러 여비가 모두 알고 소문을 냈다. 또 황씨의 몸종이 비밀히 말하기를, “당초떠날 때에 덕장이 나무 빗 한 개를 준 일이 있다.”하였으나, 황제의 사신은 모두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가 황씨의 처녀 아님을 힐문하니, 그제야 이르기를, “일찍이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조예(皂隷)와 간통하였다.”하였다. 황제가 성을 내어 우리 나라를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하였는데,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궁인 양씨(楊氏)가 이 사실을 알고 한씨에게 그 연고를 말하였다.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황씨는 집에 있는 사사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알리오.”하니,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명하여 벌을 주게 하였는데, 한씨가 황씨의 뺨을 때렸다. 이듬해 태종 18년에 황제가 보낸 선재(善才)가 우리 태종에게 말하기를, “황씨는 성질이 험하고 온화한 빛이 없어, 꼭 전생에 몹쓸 짓을 한 숙채(宿債)를 지고 태어난 여자 같다.”하였고, 세종 5년에 나온 사신 해수(海壽)는 임금에게 이르기를, “황씨가 도중에서 복통이 심할 때, 우리들이 보면 조선말로 배가 아프다 하고 부끄러운 빛을 뚜렷이 띠우고 안으로 들어갔다.”하였다. 황제가 죽자 궁인(宮人)으로 순장(殉葬)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유모 나는 가오, 유모 나는 가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자가 걸상을 빼내므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여러 죽는 자가 처음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하니, 인종이 분명히 허락하고, 한씨가 죽은 다음 인종이 김흑을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궁중의 여러 여수재(女秀才)들이 이르기를, “근일 어(魚)·여(呂)의 난은 옛날에도 없던 큰 일이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고, 또 옛 서적에 있는 말인데, 처음에 불교가 여러 나라에 퍼질 때 조선이 거의 중화(中華)가 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작기 때문에 중화가 되지 못하였으며, 또 요동 이동이 옛날에 조선에 속하였는데, 이제 만일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 틀림 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을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인종이 윤봉(尹鳳)을 불러 묻기를, “김흑을 돌려보내고자 하나, 근일의 사건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하니, 봉이“사람마다 제각기 마음이 있는 것인데, 소인이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하였다. 김흑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특히 공인(恭人)으로 봉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왕씨(王氏)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왕씨가 죽게 되자, 황제가 크게 슬퍼하고 상심하여, 그 후의 처사가 모두 빗나가, 형을 집행함이 참혹하였다. 어(魚)·여(呂)의 난을 한참 처리할 때, 벼락이 봉천(奉天)·화개(華蓋)·근신(謹身) 세 전(殿)에 떨어져 모두 타버렸는데,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기를, “황제가 반드시 천변을 두려워하여 주륙(誅戮)을 그치리라.”하였으나, 황제는 강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주륙을 행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뒤에 윤봉이 사신으로 와서 대강 줄거리를 전하고, 김흑이 돌아온 뒤 그 자상한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사건의 정리 1. 발단 중국인 상인의 딸 여씨 : 님 우리 성이 똑같으니 친하게 지내요 조선여인 여씨 : ...뭐래? 중국인 상인의 딸 여씨 : ...날 감히 무시해!! 2. 전개 현인비 권씨를 질투한 중국인 상인의 딸 여씨가현인비 권씨를 독살함 중국인 상인의 딸 여씨 : 조선여자 여씨가 현인비를 독살했음! 영락제 : 뭐라아아앗! 다 죽여버려! 조선여인 여씨 : 어? 어? 악!(사망) 3. 전환 영락제의 총애가 예전만 못하자 중국상인의 딸 출신 여씨 : 어씨, 좋은 남자가 있는데. 어때? 어씨 : ...앗흥? 영락제 : 난 네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하지만 용서해주지) 여씨, 어씨 : 이젠 끝이야. 모두 끝났어!(자살!) 영락제 : ...이런 시풋!! 4. 절정영락제 : 환관이랑 사통하는 거 알면서도 왜 나한테 말 안했어? 너님 사형. 여씨의 시비 : 현인비독살 사건의 진범을 알고 이뜸! 살려주셈! 영락제 : what?여씨의 시비 : 그 범인이 조선출신 여씨가 아니어뜸!누구누구누구누구... 영락제 : 재조사가 필요하군. 외쳐!EEE!! 5. 결말 2800여명 : 악! 공헌현비 한씨 : 구, 굶어죽을지도...그게 더 마음이 편하려나 최씨 : ...살아남아서 다행인가...아니 이게 더 불행이려나... 그러나 위의 기사에서 보듯 영락제가 1424년 북원을 치던 중 군중에서 사망하자 이들은 순장당하게 된다. 기사에서는 1424년에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김흑이라는 여인은 1435년에 조선에 돌아왔고 이 때 있었던 일은 1435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이 여인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상기한 기사의 내용에 답이 있는 듯하다. “근일 어(魚)·여(呂)의 난은 옛날에도 없던 큰일이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고, 또 옛 서적에 있는 말인데, 처음에 불교가 여러 나라에 퍼질 때 조선이 거의 중화(中華)가 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작기 때문에 중화가 되지 못하였으며, 또 요동 이동이 옛날에 조선에 속하였는데, 이제 만일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을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세종 26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17일(무오) 2번째기사 中(이 기사의 감상 포인트 - 조선이 빡쳐서 쳐들어오면 어쩌냐는 명나라의 인식, 물론 이 경우는 미국이 영국이 빡쳐서 항공모함 보내면 어쩌나 하는 정도로 보이지만-_-;;;) 명은 조선에서 이 일을 빌미삼아 요동을 공격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아예 죽여버려서 이 말이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듯한데 왜 살려서 보내준 것일까. 이들이 돌아올 수 있게 된 이유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길 바란다.세종 68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4월 26일(정묘) 5번째기사 김흑(金黑)이 말하기를, “한씨(韓氏)가 죽은 뒤에 날마다 태황 태후(太皇太后)를 모시었는데, 대우가 대단히 후하고 하사하여 주시는 것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태황 태후께 여쭈기를, ‘늙은 것이 은혜를 입은 것이 대단히 후하온데 다만 고향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였더니, 태후가 허락하고 돌아가기를 명하였습니다. 인하여 집찬비(執饌婢)와 창가비(唱歌婢)를 아울러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더니, 태후가 말하기를, ‘와서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 ’고 하시고, 인하여 한꺼번에 돌려보내기를 명하고, 하직하는 날에는 태후께서 김흑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였습니다.”하였다.김흑이 받은 고명(誥命)의 말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유(詔諭)하노라. 짐은 생각건대, 제왕으로서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는 자는 반드시 어버이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은혜를 미루어 미치게 하고, 만일 사랑하던 사람에게 일찍이 보육(保育)의 근로(勤勞)가 있는 자에게도 또한 은혜를 미루어 미치게 하나니, 인(仁)의 지극함이요 의(義)의 융숭함이다. 슬프다, 너 김씨는 고 강혜 장숙 여비(康惠莊淑麗妃)의 유모(乳母)이다. 여비(麗妃)는 공손히 선제(先帝)를 섬기어 현숙(賢淑)하다고 일컬었는데, 육어(六御)가 승하(升遐)하자 몸을 버리어 순종하였으므로, 이미 봉작(封爵)과 시호(諡號)를 더하여 어진 행실을 표하였는데, 네가 옛날에 보육의 근로가 있음을 생각하여, 이제 특별히 봉하여 공인(恭人)을 삼는 것이니, 이 광영(光榮)을 생각하여 공경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 홍희 황제(洪熙皇帝)의 명령이다.” (세상은 인맥빨)어찌되었건 최소 세 번의 사선을 넘어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후 어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일로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변하였을 것이다. 이 일로 명에 항의를 하지는 못하였어도 사람들의 인식이 어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 42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10월 4일(임오) 1번째기사 세 사신이 한(韓)씨를 모시고, 화자(火者) 정선(鄭善)·김안명(金安命)을 인솔하고서 해청(海靑) 1연(連), 석등잔석(石燈盞石) 10개를 가지고 돌아가니,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보내고, 진헌사(進獻使) 총제(摠制) 조종생(趙從生)과 한씨의 오라비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확(韓確)이 함께 갔다. 도성 안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 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殉葬)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하였다. 행인1 : 저 집안은 둘이나 생귀신이 되었다네 행인2 : 저를 어찌할꼬그리고 이렇게 순장을 하는 것에 대해 조선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것에 관해서는 아직 조선여인들이 순장당한 것을 알지 못하였던 때의 기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세종 30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0월 9일(갑술) 8번째기사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원민생(元閔生)에게 들으니,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어 중국에 입조(入朝)했을 때에, 따라간 재상이 혹 세자의 뒤에 앉기도 하고 혹 앞에 서기도 했었는데, 중국 사람이 보고 웃더라고 하였다. 재상이 세자를 공경하여 꿇어앉아 말하면 세자 역시 공경하여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태자가 뜰에 내려서 사대부가 절하는 것을 답례한 일이 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서거나 앉거나 상관없을 것 같은데, 우리 나라 재상이 이로써 웃음을 당했다. 만약 세자가 친왕(親王)·군왕(郡王)·요동 도사(遼東都司)와 상대해 섰을 적에는 재상이 꿇어앉아 말함이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하니, 영의정 이직(李稷)과 이조 판서 허조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고, 허조가 또 계하기를, “신이 전에 양녕 대군을 따라 중국에 입조(入朝)하였는데, 예궐(詣闕)할 때에 말[馬]이 없어서 도보로 다녀왔기 때문에, 몸이 곧 피곤하여 물러나와 꿇어앉았더니, 군사들이 같은 소리로 비웃더이다. 그러나 꿇어앉는 예는 주문공(朱文公)이 말한 것이니 신의 마음에 의혹되지 않습니다. 또 중국의 예법이 옛적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장례(葬禮)만 하더라도 ‘허수아비로라도 순장(殉葬)하면 후손이 끊어진다. ’는 옛말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것인데, 지금 태종 황제의 장사에 궁녀 15인을 순장(殉葬)하고, 반우(反虞)하는 날에 풍악을 울려 시체를 즐겁게 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하였다.(이 기사의 포인트 : 중국 별 거 아니네)(1424년의 기사, 그러니까 1435년, 김흑 등의 귀국으로 알게 된 조선 여인들의 순장 사건에서는 30여명의 궁인이 순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425년,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15명이 순장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13릉에는 東井과 西井이란 우물이 있다. 동정은 덕릉(德陵) 동남쪽 2리에 있고 서정은 정릉(定陵)의 서남쪽 1리 덜어진 곳에 있다. 이곳이 성조의 비빈들이 순장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태조 주원장에게서 시작된 명나라 때의 순장제도는 성조 영락제 이후에도 인종(仁宗), 선종(宣宗)때까지 계속되다가 1464년 영종(英宗)이 죽으면서 유조를 내려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함으로서 겨우 폐지됐다. =======1. 영락제 사후에는 선덕제가 딱 한 번 공녀를 요구하였고, 그 후 청에서 ‘의순공주’를 데려간 일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공녀 차출은 더 이상 없었다. 물론 정덕제 주후조가 공녀를 요구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급사하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던 일도 있었지만 이 경우는 불발. 2. 조선 출신 여인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 보이는 것은 1차 차출 이후 1409년, 2차 차출이 있었기 때문이다.3. 한확은 누이 두 사람이 각각 영락제와 선덕제의 비가 되었으며 그의 딸은 세조의 큰 아들, 덕종(추존)의 부인이 되어 그 아들이 각각 월산대군과 성종이 되었다. 즉 역사상 유명한 인수대비가 바로 그녀. 한확의 경우에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누이가 여비麗妃가 되어 영락제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사신으로 명에 가 금과 은을 공물로 바치는 일을 멈추어달라고 하여 성사시킨 인물이다. 4. 여비麗妃는 영락제가 진중에서 사망하자 자살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김흑이 모시던 한씨는 다른 사람인 듯하다...라고는 하는데 자살한게 아니라 순사를 자살로 잘 못 읽었음.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어여의 난 때 순사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듯함.5. 賢妃라고 적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顯仁妃라고 하는 듯. 아마 이쪽이 정답? - 1424년에 순사한 한씨가 공헌현비賢妃임. 현인비 권씨랑 공헌현비 한씨랑 헷갈려서 그러한 듯============= 232.39 Kbytes 아이유는 귀엽구나!아이유는 귀엽구나!!아이유는 귀엽구나!!! B사감 2011-03-07 (월) 17:06 중국 역사를 파고들다보면 얘네들 qt인증하는 두 가지 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순장하고 전족이죠.가장 무능하고 명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만력제를 제가 안까는 이유가 임진왜란은 아니고 순장을 폐지했기 때문이라죠. 댓글주소 중국 역사를 파고들다보면 얘네들 qt인증하는 두 가지 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순장하고 전족이죠.&nbsp;<div>가장 무능하고 명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만력제를 제가 안까는 이유가 <s>임진왜란은 아니고</s> 순장을 폐지했기 때문이라죠.</div> Nordenfelt 2011-03-07 (월) 17:29 한반도에서는 이미 삼국시대에 순장 풍습이 사라진 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중국은 그리 오래 갔던가요.징한 놈들. 사람이 많으니 목숨의 가치도 낮아지는 걸까요. =ㅅ= 댓글주소 한반도에서는 이미 삼국시대에 순장 풍습이 사라진 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중국은 그리 오래 갔던가요.<div>징한 놈들. 사람이 많으니 목숨의 가치도 낮아지는 걸까요. =ㅅ=</div> 나이트해머 2011-03-07 (월) 17:47 원나라의 잔재입니다. 세종조까지 이어진 공녀와 함께 말이죠.원나라는 알면 알수록 까게 됩니다. 당장 화북 인구 반토막 감소만 해도... 금나라 전성기 인구가 3천만에 육박하는데 몽골하고 죽어라 싸우다보니 멸망 직전엔 꼴랑 500만 남고, 원 치세를 지나 명나라가 건국되서 인구 파악을 해 보니 6천만 인구 중 85%가 강남, 하북 일대는 고작 5%에 화북 전체를 통틀어도고작 1500만도 안남았다는 경악스런 인구감소 상황을 보면 몽골이 얼마나 피를 뿌렸는지, 원의 통치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체감할 수 있죠. 댓글주소 원나라의 잔재입니다. 세종조까지 이어진 공녀와 함께 말이죠.<BR>원나라는 알면 알수록 까게 됩니다. 당장 화북 인구 반토막 감소만 해도... <BR>금나라 전성기 인구가 3천만에 육박하는데 몽골하고 죽어라 싸우다보니 멸망 직전엔 꼴랑 500만 남고, 원 치세를 지나 명나라가 건국되서 인구 파악을 해 보니 6천만 인구 중 85%가 강남, 하북 일대는 고작 5%에 화북 전체를 통틀어도&nbsp;고작 1500만도 안남았다는 경악스런 인구감소 상황을 보면 몽골이 얼마나 피를 뿌렸는지, 원의 통치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체감할 수 있죠. 아스카아린 2011-03-07 (월) 17:56 원이야 뭐..- 중국애들을 사람 취급안했잖아요?몽고 족의 통치는 노예지배였으니 뭐. 댓글주소 <P>원이야 뭐..- 중국애들을 사람 취급안했잖아요?<BR><BR>몽고 족의 통치는 노예지배였으니 뭐.<BR></P> 나이트해머 2011-03-07 (월) 18:11 안그렇습니다. 원 황실은 중국 천자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대내외적 및 후세에 인정받았고, 최근의 몽골 신분질서는 '차별' 이 아니라 '분리' 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몽골 문제는 몽골끼리, 한족 문제는 한족끼리 알아서 해결' 에 가깝죠.오히려 문제는 다른데 있죠. 애초에 쿠빌라이 칸 이후 황위가 빈번하게 교체되기도 했다는 문제로 인해 제대로 중국 왕조적 구조개혁에 실패했고,유목민족적 사회구조의 잔재가 남은 상태가 되답니중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후계구도가 불명확하다보니 결국 황제가 바뀔때마다 내전이 터지고, 춘추시대가 생각나는봉건제 형태로 구축되다보니 전국적인 정책 시행도 어렵고넓은 땅과 사람을 받은 제후들이중앙정부 이상으로 강력해져 버렸죠. 대표적인 세력이 동북3왕가입니다.거기다 중국쪽으로 남하해 중앙귀족이 된 세력과 몽골 평원에 그대로 잔존해 세력을 형성한 몽골귀족 사이의분쟁까지 생각하면 제대로 된 통치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을 정도. 결국 몇년마다 한번씩 터져나온 내란과 무능한 통치로 원은 망했죠. 주원장이 강남을 통일하고 북상할때에도 원 정부는 내전중이였을 정도로요. 수도 코앞에 올라왔을때에야 겨우 대처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 댓글주소 안그렇습니다. 원 황실은 중국 천자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대내외적 및 후세에 인정받았고, 최근의 몽골 신분질서는 '차별' 이 아니라 '분리' 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몽골 문제는 몽골끼리, 한족 문제는 한족끼리 알아서 해결' 에 가깝죠.<BR><BR>오히려 문제는 다른데 있죠. 애초에 쿠빌라이 칸 이후 황위가 빈번하게 교체되기도 했다는 문제로 인해 제대로 중국 왕조적 구조개혁에 실패했고,&nbsp;유목민족적 사회구조의 잔재가 남은 상태가 되답니&nbsp;중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후계구도가 불명확하다보니 결국 황제가 바뀔때마다 내전이 터지고, 춘추시대가 생각나는&nbsp;봉건제 형태로 구축되다보니 전국적인 정책 시행도 어렵고&nbsp;넓은 땅과 사람을 받은 제후들이&nbsp;중앙정부 이상으로 강력해져 버렸죠. 대표적인 세력이 동북&nbsp;3왕가입니다.&nbsp;거기다 중국쪽으로 남하해 중앙귀족이 된 세력과 몽골 평원에 그대로 잔존해 세력을 형성한 몽골귀족 사이의&nbsp;분쟁까지 생각하면 제대로 된 통치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을 정도. <BR><BR>결국 몇년마다 한번씩 터져나온 내란과 무능한 통치로 원은 망했죠. 주원장이 강남을 통일하고 북상할때에도 원 정부는 내전중이였을 정도로요. 수도 코앞에 올라왔을때에야 겨우 대처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 Nordenfelt 2011-03-07 (월) 18:10 고려가 대몽항쟁기에 대차게 갈리는 바람에 인구가 급감했다는 소리는 들어봤습니다만 중국도 그 정도였나요.(...)이건 뭐 전쟁이 아니라 자연재해급의 참사네요. 우와. =ㅅ= 댓글주소 고려가 대몽항쟁기에 대차게 갈리는 바람에 인구가 급감했다는 소리는 들어봤습니다만 중국도 그 정도였나요.(...)<div>이건 뭐 전쟁이 아니라 자연재해급의 참사네요. 우와. =ㅅ=</div> ☞특수문자 hi 총 게시물 81,777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7917 [네타/부기팝,금서목록] 최강이라는 녀석들의 공통점. +5 kikki 4년전 2431 37916 아버님은 위대하십니다. +3 메가날백수 4년전 1557 37915 후덜.. 라티님 판갤공모전게시글이 정보로 날아갔네요 +3 치르코 4년전 1567 37914 팬픽과 패러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10 망상공방 4년전 2225 37913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조합 +6 하야미 4년전 2264 37912 여러분은 고백했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어보신적이있나요? +19 위시어카렌 4년전 2203 37911 크아악... 내 포인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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